철학자의 양털

     

        징크화이트 (2)

     

        철학자의 양털

     

      화이트의 용도는 매우 다양하고, 그래서 다른 색깔보다 그 사용량도 월등합니다. 유독 화이트만 큰 용량으로 생산되는 것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그런 화이트의 독보적 위치를 오랜 시간동안 연백이 차지했었습니다. 치명적인 독성에도 불구하고 연백이 뿜어내는 그 마법같은 효과는 쉽게 떨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겠지요. 그러나 치명적 독이 든 성배인 연백은 기본적으로 불투명한 백색이기 때문에 다양한 표현에 분명 한계도 있었을겁니다.

     

     가령 이른 새벽 산속 호숫가에 스며드는 잔잔한 안개를 표현하려고 하면, 사실 여기에 적합한 색은 흰색밖에 없을텐데 불투명한 연백은 그 미묘한 뉘앙스를 섬세하게 그려낼 수가 없었겠지요. 또 여성들의 투명한 베일이 화면 가득히 넘실대는 드레스나 창문너머로 스며드는 눈부신 빛의 질감을 표현하는 것 역시 연백이 그 역할을 무리없이 감당하긴 했지만, 고도의 세심함과 기술이 요구되었을 겁니다.

     

     때마침 당시 유행하던 인상주의의 여파로 표현의 대상이 사물에서 ''으로 옮겨가는 시대의 흐름과도 무관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아틀리에에서만 머물던 화가들이 점차 캔버스를 들고 야외로 나가게 되면서 빛의 변화와 색조를 섬세하게 표현하는데 필요한 화이트에 대한 요구 역시 징크화이트의 출현에 한몫을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상황은 밑에서 언급하겠지만, 필요에 의해 발명이 되었다긴 보다는, 필요로 인해 '발견'이 된 것에 가깝긴 하지만요.

     

      징크화이트의 징크(zinc)는 금속 아연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연에서 만들어낸 화이트입니다. 징크화이트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아연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고대에서는 아연을 주로 구리와 합금한 황동으로 사용하였는데, 로마시대에는 벌써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제조법이 알려져 있어서 그것으로 주화와 무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동양에서도 중국에서 아연을 주화 제조 등에 썼는데, 중세 이후 유럽에서는 아연을 직접 생산하지는 않다가,  1605년부터 동인도 회사를 통해 필요한 아연을 중국에서 수입해서 썼다고 합니다.

     

     아연이란 단어를 좀 살펴보면 한자로 亞鉛으로 표기하는데, 버금 아(), 납 연(), 즉 말하자면 아연과 비슷하다는 말이지요. 실제 금속 아연의 용도와는 별개로 하더라도, 납으로 만든 아연인 연백의 뒤를 징크화이트가 이었으니, 적어도 화이트에서만은 아주 고대부터 아연의 운명을 예견하고 결정지어준 역사에 남을 예언자적인 작명이지 않을 수가 없군요.  

     

    산화아연

     

     

     아연을 백색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산화아연입니다. 사실 산화아연 분말로 화이트를 만드니, 징크 화이트의 모든 것이 실은 산화아연으로 부터 출발하는 셈입니다. 산화아연은 말 그대로 아연이 산소와 결합하여 만들어진 물질인데, 흰색 분말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고대 인도와 그리스에서 의료용 연고로 쓰이기도 했다는 산화아연은 중세 유럽에서는 '철학자의 양털', '아연의 꽃' 등으로 불리웠는데, 그 배경이 조금 독특합니다.

     

    산화아연의 나노이미지

     

     

     중세 유럽에서는 아연을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화아연은 꽤나 신기한 존재였던 듯 합니다. 이 신기한 물질을 다루는 일은 당연스럽게 당시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와 주술사의 역할을 두루 감당하던 연금술사들의 몫이었습니다. 산화아연은 주로 황동을 제조할 때 생긴 부산물로 얻을 수 있었는데, 아연증기를 공기 중에서 태웠을 때 만들어지는 이 흰색 가루는 연금술사들에게 꽤나 매력적이었나 봅니다. 차가운 금속에서 태어난 빛나는 흰색 가루를 연금술사들은 그들의 의식에 쓰곤 하였는데, 그 모습이 양털 같았는지 산화아연을 '철학자의 양털'로 불렀다고 하는군요. 여기서 철학자는 말할 것도 없이 연금술사입니다. 한편 아연증기를 태울 때 화덕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에서  '아연의 꽃'이라는 이름이 나왔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최근까지 산화아연을 '아연화(亞鉛華)', '아연의 꽃'이라 불렀다고 하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산화아연은 꽤나 신기한 존재였던 듯 합니다.

     

    홍아연석

     

     또다른 이름으로 연기를 의미하는 페르시아어 'dud' 에서 파생되어 'tutty(터티)' 라고도 불리웠는데, 이 단어는 중세시대에 산화아연을 유럽에 처음 소개해 준 아랍 사람들의 용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니 당시의 아랍 사람들이 산화아연을 보며 느낀 이미지도 중세의 유럽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나 봅니다. 산화아연을 아연광석에서 직접 산출해 내는 시기에는 블러드 화이트 (blood white) 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색이 붉었던 '홍아연석'에서 분리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도 합니다. 산화아연이 안료로 쓰인 역사는 그리 길지 않지만, 산화아연의 역사는 그리 짧지 않았음을 명칭의 다양함이 대변해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참고사이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44&contents_id=7690&leafId=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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