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오딧세이

     

     

          연백 (1)

     

     그림을 그리려 처음 종이나 캔버스를 마주할 때 시야를 가득 채우는, 화면 가득한 흰색은 누구에게나 설레임과 기대의 시작인 듯 합니다. 동시에 앞으로 쉴새없이 이어질 절망과 고뇌의 전주곡이기도 하겠구요. 한편 캔버스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주름없이 펼쳐진 흰색 바탕은 한 과정의 기분좋은 결말이기도 합니다. 흰색이 가지고 있는 시작, 마지막, 다시 새로운 시작, 순결함 같은 그런 이미지들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이렇게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주되는 듯 합니다.

     

     흰색은 또한 색의 시작이면서, ‘색이 없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기본색 중 하나인 이 흰색을 제조하기 위해 고대부터 많은 방법들이 연구되었는데요, 깨끗하기 그지 없는 흰색의 제조방법은 그다지 깨끗하지만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흰색은 꽤나 아이러니한 색상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물감을 판매하다보면, 생산은 되지만 잘 판매가 되지 않는 색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제일 많이 쓰이는 색 중 하나인 화이트를 예로 들어보면, 흔히 화이트는 징크 (zinc) 와 티타늄 (titanium)을 주로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징크는 혼색용으로, 티타늄은 흰색 자체를 표현할 때 쓰는 것으로 대략 구분을 합니다. 그런데, 화이트 사이에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긴 하지만, 거의 찾는 사람들이 없는 색이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꽤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홀베인(Holbein) 에서 나오는 실버화이트(Silver white)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저 은색이 좀 가미된 흰색인가보다라고 단순히 생각을 했는데,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도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는 많이들 쓰는가보다라고 단순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근래에는 전세계의 메이저 브랜드들이 거의 다 국내에 수입되고 있는데, 세계 최초의 유화물감이라는 올드 홀랜드 (Old Holland)의 색구성을 보고 있으면, 화이트가 5종류나 됩니다. 티타늄과 징크와 그 둘이 섞인 믹스 화이트 외에 Cremnitz white Flake white 라는 이름도 그 틈에 끼어있습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용하는 사람이나 판매하는 사람이나 그다지 신경을 안쓰는 그 흰색들로부터 흰색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연백(鉛白, Lead White)

     

    모든 물감이 튜브에 담겨져 진열되고 있는 지금에야 색을 만들고, 사용하는 일보다는 작품에 어떤 색이 어울릴까를 고민하는게 더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색을 일일이 만들어 써야 했던 과거에는 색을 만드는 일 역시 만만치 않게 힘든일이었을 겁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흰색은 가장 많이 쓰이는 색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흰색을 어떻게 만들어썼을까요?

     

    여러가지 방법이 존재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방법이 을 이용한 방법이었습니다. 호칭은 그 역사만큼이나 다양하지만 대표적인 명칭만 보자면, 우리말로는 연백(鉛白) 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호분(胡粉)오늘날 우리가 쓰는 그 호분과는 별개입니다-으로 주로 불리웠습니다. 연백의 뜻은 납 연 ()에 흰 백 (), 말 그대로 납으로 만든 흰색이란 뜻입니다.

     

    서양에서는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위에서 말한 cremnitz white, flake white, silver white는 모두 이 연백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세가지 용어가 근래까지도 연백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남아있습니다. 요즘에는 각각 성분에 약간씩 차이를 주어 명칭에 따라 구성요소가 차이가 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연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시면 큰 무리가 없습니다.

     

    연백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된 아주 질좋고 훌륭한 화이트입니다. 한편 독이 든 사과처럼 그 좋은 질감만큼 치명적이고, 그래서 논란도 많은 화이트입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이집트 시대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16~19세기 유화가 전성기를 누리던 유럽에서, 특히 렘브란트로 대표되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연백이 가장 유명합니다. 당시에 많이 쓰이기도 했고, 연백의 질이 좋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당시의 연백 제조방법이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Dutch process’, ‘네덜란드식 제조법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방식은 대표적인 연백 제조 방식인 동시에 질좋은 연백을 만들 수 있어 꽤 오랜 시간동안 사용되었습니다. 이 방법은 동시에 꽤나 악명이 높았는데, 그 악명높은 제조방법을 소개하는 것에서부터 연백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연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연백

     

    'white > cremnitz whi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어도 좋아  (0) 2014.04.29
    빛의 이면  (0) 2014.04.29
    반복과 변주  (0) 2014.04.28
    네 시작은 창대하도다  (0) 2014.04.28
    납에서 눈꽃이 나리네  (0) 2014.04.16